바쁜 회사는 왜 더 배우지 못하는가?
오후가 되면 사무실의 공기가 바뀐다.
오전에 들어온 문의는 아직 답을 다 못 했다. 견적서는 다시 고쳐야 한다. 고객은 납기를 묻고, 현장은 오늘 안에 확인해 달라고 한다. 누군가는 외근 중이고, 누군가는 회의에 들어가 있다. 메신저에는 짧은 말들이 계속 쌓인다.
“이건 누가 알지?”
“지난번에도 비슷한 일 있지 않았나?”
“그때 어떻게 처리했더라?”
대답은 보통 사람에게 있다. 문서에 있지 않고, 기준에 있지 않고, 회의의 다음 질문에 있지 않다. 누가 기억하고 있으면 빨리 지나간다. 그 사람이 없으면 다시 찾는다.
하루는 어떻게든 끝난다. 문제도 대체로 처리된다. 그런데 다음 달에 비슷한 일이 다시 생기면 회사는 이상하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회사가 게으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바쁘다.
하루는 끝났는데 회사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회사는 많은 일을 겪는다. 고객 불만도 겪고, 납기 지연도 겪고, 품질 문제도 겪고, 갑작스러운 요청도 겪는다. 그래서 경험은 많다.
하지만 경험이 많다는 말과 학습이 일어났다는 말은 다르다.
경험은 지나간 일이다. 학습은 그 일이 다음 판단을 바꾼 상태다.
고객 불만을 막았다면 경험이다. 그 불만 때문에 다음 견적서의 조건 문장이 바뀌고, 출고 전 확인 항목이 하나 늘고, 회의에서 같은 질문이 다시 나오도록 정리되었다면 학습에 가까워진다.
담당자가 밤늦게까지 문제를 해결했다면 경험이다. 다음 사람이 같은 문제를 만났을 때 덜 헤매도록 기준과 순서가 남았다면 학습이다.
제임스 마치(James G. March)는 조직이 기존 방식을 활용하는 일과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 사이에서 긴장을 겪는다고 보았다.[1] 바쁜 회사는 대개 활용 쪽으로 밀린다. 오늘의 납기, 오늘의 보고, 오늘의 고객 대응을 먼저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회사는 오늘의 일을 해내야 한다.
다만 오늘의 일을 끝내는 방식이 내일의 기준을 만들지 못하면, 회사는 바쁨 속에서 조금씩 제자리걸음을 한다.
바쁨의 착시
바쁜 회사는 자신이 많이 배우고 있다고 느끼기 쉽다. 많은 고객을 만나고, 많은 예외를 처리하고, 많은 문제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쁨은 학습의 증거가 아니라 학습을 밀어내는 조건일 수 있다.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정리하는 시간이다.
“이번 건은 급했으니까 넘어가자.”
이 말은 현장에서 자주 맞는 말이다. 실제로 급하다. 고객은 기다려주지 않고, 현금흐름은 멈추지 않고, 납기는 지나간다.
이 말은 자주 맞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매번 급해서 넘어가면, 급한 일이 끝난 뒤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둘째로 사라지는 것은 예외의 의미다.
처음에는 예외였던 일이 반복되면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회사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새로운 업무 방식이다. 그런데 바쁜 회사에서는 예외가 계속 예외로 불린다. 그러면 가격도, 일정도, 책임도 바뀌지 않는다. 다만 현장만 더 복잡해진다.
셋째로 사라지는 것은 사람 밖의 기억이다.
일을 처리한 사람은 안다. 왜 늦어졌는지, 어느 고객에게 어떤 표현을 쓰면 안 되는지, 어떤 부품이 어느 공정에서 자주 막히는지, 어떤 보고를 하면 대표가 다시 묻는지 안다.
그런데 회사는 모른다.
정확히는, 회사가 다시 쓸 수 있는 형태로 알지 못한다.
머릿속의 지식은 회사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노나카 이쿠지로(Ikujiro Nonaka)는 조직의 지식창출을 개인의 암묵지가 조직 안에서 공유되고, 설명되고, 결합되고, 다시 행동으로 내재화되는 과정으로 보았다.[2]
이 말을 어렵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사람이 겪은 일이 회사가 다시 쓸 수 있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현장 지식은 처음부터 깔끔한 문장으로 나오지 않는다. 대개는 투덜거림으로 나온다.
“이 고객은 꼭 마지막에 조건을 바꿔요.”
“이건 견적 낼 때부터 확인했어야 했어요.”
“이 공정은 늘 여기서 밀려요.”
이 말들은 불평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잘 보면 조직학습의 재료다. 회사가 놓친 기준이 어디 있는지 알려준다.
그런데 회사는 이 말들을 처리하고 지나갈 때가 많다. 불평으로 듣고 끝내거나, 담당자 성격의 문제로 넘기거나, “다음부터 조심하자”로 닫아버린다.
그러면 지식은 사람 안에만 남는다.
사람 안에만 남은 지식은 오래 버티기 어렵다. 담당자가 쉬면 멈추고, 부서가 바뀌면 끊기고, 퇴사하면 사라진다. 바쁜 날에는 꺼내 쓰기도 어렵다.
조직의 능력은 사람이 많이 아는 상태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아는 것이 회사의 질문, 기준, 순서, 회의, 점검으로 조금씩 옮겨갈 때 생긴다.
배움은 세 번 옮겨 적힐 때 남는다
회사가 배웠는지는 교육 횟수나 회의 횟수로 판단하기 어렵다.
오히려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봐야 한다.
첫 번째는 질문이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었다면 회의의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누가 실수했나”에서 멈추지 않고 “왜 이 일이 다시 가능했나”로 넘어가야 한다. 질문이 바뀌지 않으면 다음 회의도 비슷한 말로 끝난다.
두 번째는 기준이다.
질문이 나왔으면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 견적서의 확인 문장, 출고 전 점검 항목, 고객 응대의 금지 표현, 예외 요청을 받을 때의 조건 같은 것들이다. 기준은 거창한 규정일 필요가 없다. 다음 사람이 같은 상황에서 덜 흔들리게 해주는 문장이면 된다.
세 번째는 반복이다.
기준은 한 번 써두었다고 작동하지 않는다. 회의에서 다시 읽히고, 업무표에서 다시 보이고, 누군가가 “이번에는 그 기준대로 했나”라고 물어야 한다. 반복되지 않는 기준은 문서가 된다. 반복되는 기준은 루틴이 된다.
그래서 배움은 머릿속에서 한 번, 문장으로 한 번, 행동으로 한 번 옮겨 적힐 때 남는다.
외부 자료가 많아질수록 더 안 배울 수도 있다
배움의 문제는 외부 지식에서도 반복된다.
교육을 듣고, 세미나에 가고, 전문가 조언을 받고, 좋은 보고서를 읽는 일은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외부 지식은 회사 안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바로 회사의 지식이 되지 않는다.
코헨(Wesley M. Cohen)과 레빈탈(Daniel A. Levinthal)은 흡수역량(absorptive capacity)을 외부 지식의 가치를 알아보고,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능력으로 설명했다.[3] 여기서 중요한 말은 활용이다. 좋은 자료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자료가 회사의 판단과 행동으로 옮겨가야 한다.
바쁜 회사는 외부 자료를 더 많이 받을수록 더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다. 좋은 말은 늘어나는데, 선택은 줄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은 많아지는데, 무엇을 그만둘지는 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외부 지식은 학습이 아니라 숙제가 된다.
책상 위에는 좋은 자료가 쌓이고, 회의에서는 좋은 말이 반복된다. 그러나 조직은 그대로 움직인다.
이때 필요한 것은 자료를 하나 더 받는 일이 아닐 수 있다. 이미 들어온 말 중 무엇을 회사의 기준으로 바꿀지 정하는 일일 수 있다.
AI가 만든 기록도 그냥 쌓일 수 있다
AI는 이 문제를 없애기보다 더 크게 보여준다.
AI는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고객 응답을 만들고, 자료를 요약하고, 초안을 빠르게 만든다. 그래서 기록은 늘어난다. 산출물도 늘어난다.
하지만 기록이 많아졌다고 학습이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AI가 만든 회의 요약이 다음 회의의 질문을 바꾸지 못하면, 그것은 편리한 정리다. AI가 만든 고객 응답 문안이 팀의 공통 기준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그것은 개인의 도구다. AI가 만든 분석이 책임자의 선택과 다음 점검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읽고 지나간 자료다.
AI를 많이 쓰는 회사가 더 많이 배우는 것은 아니다.
AI가 만든 것을 회사의 질문, 기준, 책임, 반복으로 바꾸는 회사가 배운다.
학습의 여유는 한가함이 아니다
학습에는 시간이 든다.
그래서 바쁜 회사는 학습을 자꾸 뒤로 미룬다. 여유가 생기면 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유는 잘 생기지 않는다. 바쁨은 대개 스스로 다음 바쁨을 만든다.
여기서 필요한 여유는 거창한 워크숍이 아니다.
문제가 끝난 뒤 10분 동안 한 문장을 남기는 것.
“다음에는 무엇을 먼저 확인할 것인가.”
반복된 예외를 한 달에 한 번 모아 보는 것.
“이제 이것은 예외인가, 표준을 바꿔야 할 신호인가.”
고객 불만을 처리한 뒤 문장 하나를 고치는 것.
“이 불만이 다시 나오지 않으려면 고객에게 처음에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이 정도의 여유도 없으면 회사는 계속 처리만 한다. 처리 속도는 올라갈 수 있지만,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구조는 남는다.
크리스 아지리스(Chris Argyris)와 도널드 쇤(Donald Schön)의 조직학습 논의는 문제가 반복될 때 단순히 오류를 고치는 수준을 넘어, 그 오류를 만든 기준과 가정까지 돌아봐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4] 현장 언어로 바꾸면 이렇다.
“이번에도 막았다”에서 끝나면 회사는 처리했다.
“왜 매번 막아야 하는 일이 되었나”를 묻기 시작하면 회사는 배울 가능성이 생긴다.
다음에 같은 일이 생겼을 때
회사가 정말 배웠는지는 다음에 같은 일이 생겼을 때 드러난다.
담당자가 덜 헤매고, 처음 확인하는 질문이 달라지고, 고객에게 설명하는 문장이 바뀐다면 경험은 조금씩 회사의 것이 된다. 회의에서 같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하지 않아도 되고, 예외가 반복될 때 가격과 일정과 책임 기준을 다시 보게 된다면 회사는 같은 시간을 다시 쓰지 않는다.
AI가 만든 기록도 마찬가지다. 기록이 다음 행동을 바꾸면 학습의 재료가 된다. 기록이 쌓이기만 하면 더 깔끔한 보관함이 될 뿐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면 회사는 경험했지만 배우지 못했을 수 있다.
바쁜 회사가 더 배우지 못하는 이유는 경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경험은 충분하다. 부족한 것은 경험을 다시 쓸 수 있게 남기는 방식이다.
학습은 많이 겪는 일이 아니다.
겪은 일을 다음 사람이 덜 헤매게 남기는 일이다.
참고문헌과 주석
-
James G. March, “Exploration and Exploitation in Organizational Learning,” Organization Science 2, no. 1 (1991): 71-87. DOI: 10.1287/orsc.2.1.71. 이 글에서는 바쁜 회사가 기존 업무 처리와 활용에 몰릴 때 탐색과 해석의 여유가 줄어드는 배경으로 사용했다.
-
Ikujiro Nonaka, “A Dynamic Theory of Organizational Knowledge Creation,” Organization Science 5, no. 1 (1994): 14-37. DOI: 10.1287/orsc.5.1.14. 이 글에서는 개인의 경험과 암묵지가 조직 안에서 설명되고 결합되어 다시 행동으로 돌아와야 지식이 된다는 배경으로 사용했다.
-
Wesley M. Cohen and Daniel A. Levinthal, “Absorptive Capacity: A New Perspective on Learning and Innovation,” Administrative Science Quarterly 35, no. 1 (1990): 128-152. DOI: 10.2307/2393553. 이 글에서는 외부 자료와 조언이 회사 안에서 가치 인식, 수용, 활용 과정을 거쳐야 학습으로 전환된다는 배경으로 사용했다.
-
Chris Argyris and Donald A. Schön, Organizational Learning: A Theory of Action Perspective (Reading, MA: Addison-Wesley, 1978). 이 글에서는 문제가 반복될 때 단순한 오류 수정이 아니라 행동을 만든 기준과 질문 자체를 다시 보는 학습이 필요하다는 배경으로 사용했다.